세계 최초 5000척 인도의 주인공은 필리핀 초계함 2번함 '디에고 실랑함'이었다. 길이 118.4m, 폭 14.9m 규모의 최신예 함정으로, 지난 3월 진수를 거쳐 10월 필리핀 해군에 공식 인도되었다. 순항속도 15노트(시간당 28㎞), 항속거리 4500해리(8330㎞)에 달하는 이 함정은 HD현대의 기술력을 집약한 상징이자, 한국 조선업의 역량을 대표하는 결과물이다.
이날 기념식에는 정기선 HD현대 회장을 비롯해 정부·지방자치단체·해운업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여 이 역사적 순간을 함께했다. 김태선 의원(울산 동구), 윤종오 의원(울산 북구), 박동일 산업통상부 실장, 안병길 해양진흥공사 사장, 박정석 고려해운 회장 등이 참석하여 한국 조선업의 성과를 축하했다.
거북선의 정신으로 백사장을 조선소로
정 명예회장이 영국 런던의 선박 컨설턴트 찰스 롱보텀을 만났을 때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지갑 속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 지폐를 내밀며 "한국은 16세기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던 나라다"고 설득한 결과, 영국 바클레이스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받아냈다.
또한 그리스 선주 리바노스를 설득할 때는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과 설계 도면을 보여주며 "지금은 모래밭이지만 여기에 조선소를 지어 대형 탱커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1972년 3월 울산조선소 기공식과 함께 시작된 HD현대의 항해는 1974년 6월 28일 울산조선소 준공식과 함께 첫 선박 '애틀랜틱 배런호'를 성공적으로 인도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26만톤급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인 이 배는 한국 대형선 건조의 첫 이정표였으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오늘 명명식은 도약하는 국력의 상징"이라고 평가했다.

HD현대의 첫 인도선 ‘애틀랜틱 배런’호. 사진제공=HD현대
글로벌 시장 변화를 주도한 기술 혁신
특히 LNG선 분야에서 HD현대가 보유한 기술력과 경쟁력은 탁월하다. 2021년 산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초대형 유조선에는 약 3만 6000톤의 후판이 사용되고, 2만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에는 5만 톤에 달하는 후판이 사용된다. LNG 운송선은 극저온에 견딜 수 있는 소재가 필수적인데, 이는 국내 철강업체들이 고망간강, 니켈강 등 특수강 개발에 나서도록 촉발했다. 현재 HD현대는 함정 시장으로도 영역을 확대하고 있으며, 상선 못지않게 군함 수출을 늘려가는 중이다.
세 조선사의 전문화와 표준화가 이뤄낸 성과
HD현대의 5000척 달성은 단일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했다. HD현대중공업(2631척), HD현대미포(1570척), HD현대삼호(799척) 등 조선 계열사들의 선종별 전문화와 역할 분담이 핵심 동력이었다. 블록 공법으로 대표되는 표준화 건조 기술은 선박의 대량생산을 뒷받침했으며, 이는 꾸준한 수주와 적기 인도를 가능하게 했다.
반세기 동안 HD현대가 거래한 선주사는 68개국 700여 곳에 달한다. 선박 한 척의 길이를 평균 250m로 가정할 경우, 선박 5000척의 총길이는 1250km에 이른다. 이는 서울에서 도쿄까지의 직선거리(약 1150km)보다 길고,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 높이(약 8800m)의 140배가 넘는 규모다. 이러한 수치는 HD현대의 생산 규모와 글로벌 입지를 수치로 나타낸다.
국내 조선 산업 발전을 견인한 동력
HD현대의 성장은 한국 조선업 전체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해왔다. 단순히 선박 건조 기업을 넘어 글로벌 조선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꾼 기업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1983년 이후 HD현대 중공업은 한 번도 조선 부문 세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으며, 미쓰비시중공업을 제치고 업계 최강자로 자리 잡았다.
조선업의 성공을 발판으로 HD현대는 정유·석유화학, 건설기계, 전기전자시스템, 태양광에너지, 로보틱스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 영역을 다각화했다. 이를 통해 글로벌 종합중공업 회사로의 성장 기반을 마련했으며, 미래 산업으로의 진출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울산·전남 지역경제의 성장 엔진
HD현대의 5000척 달성은 지역경제 활성화로도 이어졌다. HD현대중공업 조선소가 위치한 울산 동구의 제조업 종사자 3만 8200여 명 중 80%가 넘는 3만 2800여 명이 현재 조선·기자재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울산 전체 수출의 25~30%가 조선 및 해양 플랜트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는 조선업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전남 영암에 위치한 HD현대삼호 조선소는 산업별 고용에서 '조선·기타운송 장비 제조업'이 부동의 1위를 차지하도록 이끌었다. HD현대삼호의 지역 고용 파급력은 협력사를 포함해 약 2만 7000명에 달한다. 조선 산업의 성장에 따라 고용, 소비, 상권 회복 등 지역 경기 개선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중장기 산업 경쟁력 강화로도 연결되었다.
함정 시장으로 확대되는 미래 전략
최근 HD현대는 상선 못지않게 함정 시장으로의 확대에 주목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총 106척의 함정을 건조 및 인도했으며, 이 중 18척을 해외로 수출했다. 국내 최다 수출 기록을 보유하는 이 성과는 한국 조선의 기술력이 군사적 신뢰도에서도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번 5000번째 인도함이 초계함이라는 점은 HD현대의 전략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기선 회장은 미국을 비롯한 해외 조선소 및 방산 업체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지난해 미 팰런티어와 무인 수상정 개발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올해 들어서는 미 안두릴과 무인 함정 설계 협력, 에디슨슈에스트와 컨테이너선 및 MR탱커 공동 건조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 조선업 부활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에도 적극 대응 중이다. HD현대는 미 헌팅턴 잉걸스와 함정 분야에서, 에디슨 슈에스트 오프쇼어와는 상선 분야에서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서울대, 미시간대, MIT 등 주요 대학들과도 조선 인재 양성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다.

정기선 회장을 비롯한 HD현대 임직원들이 19일 울산 HD현대중공업에서 ‘선박 5000척 인도 기념행사’를 열고 단체로 주먹을 쥐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 제공=HD현대
이미지 확대보기도전의 역사, 다음 5000척을 향해
정기선 HD현대 회장은 기념식에서 "5000척은 대한민국 조선 산업의 자부심이자 세계 해양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도전의 역사"라며 "함께 만든 도전의 역사를 바탕으로 다음 5000척, 또 다른 반세기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겠다"고 강조했다.
HD현대는 이러한 목표를 현실화하기 위해 과감한 구조 재편을 추진 중이다. 다음 달에는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의 합병을 단행하여 기술적 역량을 결합하고 최첨단 기술을 개발할 예정이다. 통합 HD현대중공업은 2035년까지 연 매출 37조원을 달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해외 영토 확장도 가속화되고 있다. HD한국조선해양과 HD현대중공업은 다음 달 싱가포르에 투자법인을 설립할 예정이며, 이를 통해 HD현대베트남조선, HD현대중공업필리핀, HD현대비나 등 해외 생산거점을 통합 관리할 계획이다. 동남아 등 해외에서 선박을 건조함으로써 가격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HD현대는 이번 선박 5000척 인도를 기념하여 조선 계열사 임직원과 사내 협력업체 근무자들에게 상품권 30만원권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는 반세기의 도전을 함께한 구성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결정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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