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선필 한국퇴직연금개발원 컨설팅 부문대표.
2023년 7월 도입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은 냉정하게 평가하면 낙제점이다. 2024년 말 기준 DC·IRP 가입자의 약 71%가 참여하고 있지만, 자금의 90% 가까이가 여전히 원리금 보장 상품에 묶여 있다. 투자 상품으로 수익률을 높이겠다는 제도 본연의 취지는 사라지고, 방치된 자금의 합법적 안주만 도와준 셈이다.
최근 퇴직연금 노사정 TF가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을 발표했다. 금융기관 개방형, 연합형, 공공기관 개방형 등 전문가 그룹에 운용을 맡겨 수익률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분명 진일보한 대책이지만 우려가 앞선다. 사회적 합의 방식이 낳은 '기형적 제도'들이 현장에서 겉도는 사례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은 수익률 이전에 '퇴직금의 연속성'에 있다. 제도 도입 20년이 지났지만 연금 수령 비율이 10%대에 머무는 이유는 자명하다. 가입자들에게 퇴직금은 '노후 재원'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쌈짓돈'일 뿐이다.
선진국은 다르다. 미국은 59.5세 이전 중도 인출 시 10% 가산세와 일반 소득세를 함께 부과해 '무서워서 못 찾게' 만든다. 대신 '통산(Consolidation)' 원칙에 따라 이직 시 퇴직금을 다른 계좌로 옮기는 '롤오버(Roll-over)'를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호주는 '슈퍼 스테이플링(Super-Stapling)' 제도를 통해 이직 시 국세청(ATO) 시스템이 연금 계좌를 자동 연결한다. 내 노후 자금이 나를 따라다니게 만든 것이다.
반면 우리는 이번 기금형 도입안에서도 일시금 인출과 중도 인출의 문을 열어뒀다. 운용 주체를 전문가로 바꿔도 가입자가 수시로 돈을 빼가는 구조에서는 복리 효과도, 자산 축적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 밑 빠진 독에는 아무리 좋은 물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법이다.
기금형 제도의 성공과 퇴직연금의 연금화를 위한 전제는 명확하다. 중도 퇴직 시 일시금 인출을 법적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이를 노후까지 강제로 이어가게 하는 '강력한 통산 기능'과 '세제 체계'가 도입되어야 한다. 퇴직연금이 노후 생활의 실질적인 안전판이 되길 원한다면, 이제는 '찾기 쉬운 푼돈'에서 '나를 지키는 연금'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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