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사진=연합뉴스]](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605190908390554407cc35ccc5c112222163195.jpg&nmt=29)
퇴직연금. [사진=연합뉴스]
저조한 수익률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 기관이 자금을 통합 운용하는 기금형 제도가 본격 도입되면서, 금융권의 판도 변화는 물론 국내 증시에 장기 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될 것으로 점쳐된다. 동시에 거버넌스 구조와 책임 범위를 둘러싼 논란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20년 숙제 던진 저수익…TF 8개월 만에 구조개편 합의
퇴직연금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저조한 수익률이다. 현재 500조원이 넘는 퇴직연금의 약 70%가 예·적금 등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묶여 있으며, 확정기여(DC)형과 개인형퇴직연금(IRP)의 원리금 보장형 상품 수익률은 연 2~3%에 불과한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지난해 10월 출범한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노사정 태스크포스(TF)'가 불과 4개월 만에 획기적인 공동선언을 이뤄낸 것이다. 노사정 TF에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경영계의 한국경영자총협회, 중소기업중앙회, 정부, 청년·전문가 등이 참여했다. 고용노동부는 현재 관계부처와 노사가 참여하는 '민관 합동 실무작업반'을 가동해 오는 7월 세부안 발표를 목표로 진행 중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는 단순한 제도 개선이 아닌 20년 이상 미뤄온 퇴직연금의 근본적 구조 개혁"이라고 평가했다.
기금형 도입 논의가 본격화된 배경에는 중소퇴직기금의 성공이 있다. 2022년 도입된 중소퇴직기금 '푸른씨앗'은 도입 4년 만에 적립금 약 1조5천억원을 기록했으며, 누적 수익률도 약 26.98%에 달했다. 이는 기존 평균 수익률의 5배 이상 수준이다.
정부는 실적배당형 투자 비중 확대, 발행어음과 인프라펀드 같은 대체투자 허용, 디폴트옵션 제도 개선 등을 통해 수익률을 더욱 높일 계획이다.
퇴직연금의 의무화도 함께 추진된다. 현재는 2012년 이후 신설된 사업장에만 의무화돼 있으며, 2024년 기준 도입률은 26.5%에 불과하다. 300인 이상 대규모 사업장은 92.1%가 도입했지만, 5인 미만 영세사업장은 10.6%에 그쳐 규모별 격차가 심각한 상황이다.
기금형 3가지 체계…내년 도입 목표로 7월 세부안 마련
노사정 TF가 합의한 기금형 퇴직연금은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민간 금융회사가 별도 수탁법인을 설립하는 '금융기관 개방형', 여러 기업이 공동 기금을 조성하는 '사용자 연합형', 중소기업 가입자를 중심으로 한 '공공기관 개방형'이 그것이다. 도입 초기에는 DC형 사업장을 중심으로 적용될 가능성이 크며, 가입자가 기존 계약형과 기금형 중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 추진 중이다.
정부는 7월 세부안 발표를 거쳐 연내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할 방침이다. 2027년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번 세부안에는 수탁법인 구조에서의 책임 가이드라인과 공시 체계 개선 방향이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이것이 제도 도입의 핵심 요소"라며 "시장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려는 정부의 의지가 담긴 것"이라고 평가했다.
기금형 도입은 가입 대상 확대로도 이어지고 있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으로 중소퇴직기금 가입 대상이 기존 '30인 미만 사업장'에서 '10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되면서, 유입 자금이 대폭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이를 통해 적립금 규모가 장기적으로 국민연금 적립금을 초과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증시 변동성 완충재 vs 거버넌스 논란
기금형 도입에 대한 시장의 기대는 크지만, 과제도 많다.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은 증시 자금 유입 메커니즘이다. 현재 원리금 보장형에 머물러 있는 자금이 주식형 펀드 등 실적 배당형 상품으로 이동하면서, 장기 투자 성격의 퇴직연금 자금이 국내 증시에 대규모로 유입될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권은 이를 "시장 변동성을 완충해주는 방파제 역할"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국민연금과 함께 연 500조원 규모의 장기 자금이 증시를 지탱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오는 배경이다.
하지만 거버넌스와 책임 구조 설계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기금 운용의 의사결정 주체가 누구인지, 수익률 부진 시 책임 범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사정이 참여하는 수탁법인 구조에서 책임 범위가 불명확하면 금융사 참여 위축이나 법적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학계 전문가도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성대 경제학과 김상봉 교수는 "기금형의 장점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으면 참여자를 확보하기 어려워 제도가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데이터 인프라 표준화도 선결 과제로 꼽히고 있다. 현재처럼 금융사별 기준이 상이한 상황에서는 성과 비교와 가입자 보호 모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수익률 산출 방식, 공시 기준 등 표준화된 인프라가 마련될 때 기금형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은행 "기존 사업 위협" vs 금투 "성장 기회"…입장 극명
기금형 도입을 두고 금융권의 입장은 극명하게 나뉘고 있다. 은행권은 기존 사업 기반이 흔들릴 가능성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전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며 안정적인 수수료 수익을 확보해 온 구조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자금이 개별 금융사에서 대형 수탁법인으로 이동하면서 기존 영업 기반이 약화될 수밖에 없고, 결국 수익률과 비용 경쟁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수수료 체계 개편과 함께 대형 사업장 중심의 고객 방어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 동시에 기금형 체제 내에서 수탁기관 역할을 확보하기 위한 시스템 투자와 조직 정비도 병행 중이다. 신한금융과 우리금융 등 주요 은행들은 이미 기금형 참여를 위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금융투자업계는 이번 개편을 성장 기회로 적극 인식하고 있다. 특히 약 222조원 규모의 확정급여(DB)형 적립금이 공략 대상이다. 현재는 기업 책임 아래 운용되며 자금 이동이 제한적이지만, 기금형 체제에서는 전문 운용 역량에 따라 자금 재배분이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산운용사와 증권사들은 장기 자산배분과 대체투자 역량을 앞세워 '연기금형 운용 모델'을 준비하고 있다.
실제로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 '푸른씨앗' 제2기 운용사 재선정 입찰이 본격화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증권사 1곳과 자산운용사 1곳을 뽑는 구조로 진행 중이며, 증권업계에서는 미래에셋증권과 NH투자증권이, 자산운용업계에서는 삼성자산운용과 신한자산운용 등이 입찰에 참여하고 있다. 최종 선정된 운용사는 올해 9월부터 2030년 8월까지 약 4년간 기금을 운용할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
푸른씨앗 적립금 규모가 지난해 말 1조4천907억원에서 2030년 11조2천621억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금융사 입장에서는 사업 확장과 트랙레코드 확보 측면에서 중요한 기회로 평가하고 있다.
입법 속도 vs 시장 안정성…"속도와 안정성의 균형" 과제
제도 도입을 위한 입법 논의도 본격화되고 있다. 국회에 계류 중인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은 하반기 심사를 앞두고 있으며, 정부의 7월 세부안이 입법 추진의 핵심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시장 참여자 간 입장 차는 뚜렷하다. 은행권은 급격한 자금 이동으로 인한 시장 혼란을 우려해 단계적 도입을 주장하는 반면, 금투업계는 제도 효과 극대화를 위해 조기 도입과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한 금융권 애널리스트는 "입법 과정에서 시장 참여자 간 이해관계 조율이 핵심 과제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부는 이 과정에서 가입자 수익률 제고와 시장 효율성 개선이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면서도, 금융사 간 '연착륙'을 유도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안고 있다.
"퇴직금 안전성" vs "증시 활황"…기금형이 남긴 숙제
퇴직연금 기금형 도입은 국내 금융시장과 노후 소득 보장 체계에 상당한 파급력을 미칠 전망이다. 가입자 입장에서는 저수익 탈출이 가능해지는 긍정적 신호인 반면, 운용 손실 발생 시 책임 소재가 불명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 기금형은 계약형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 선택지로 제공되므로, 가입자의 자발적 참여 여부가 성공을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장기적으로 퇴직연금이 국민연금 적립금을 초과하면서 국내 금융시장의 가장 큰 자금 공급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시장 변동성을 완충하고 기업 가치를 제고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정부의 7월 세부안이 거버넌스 문제를 얼마나 명확하게 풀어내고, 금융권이 이 변화에 얼마나 현명하게 대응할지가 기금형 도입의 성패를 가를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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