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일 이음연구소장(경영학 박사)
‘손실 가능성’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기존 제도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냉소적 불신. 이러한 반대 이유는 기금형 제도 자체의 본질적 결함이라기 보다는, 20년간 계약형이라는 익숙한 틀에 갇혀 있던 우리 사회가 ‘기금형’이라는 낯선 개념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현이다.
중요한 것은 응답자들이 현재 치열하게 논의 중인 ‘수탁자 책임 강화’라는 핵심적인 안전장치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답변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우려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동시에 이는 ‘정보의 부재’에서 비롯된 오해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려움의 실체를 면밀히 분석하고, 수탁자 책임 강화라는 강력한 법적 장치가 어떻게 이 안개를 걷어내고 가입자들을 위한 진정한 등대가 될 수 있는지 논의해야 한다.
이 조사에서 나타난 기금형 제도 도입의 주요 반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손실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서(40.2%)’와 ‘기존 민간 금융기관과 다를 바 없어 실효성이 의문스러워서(33.5%)’. 이는 일견 합리적인 우려처럼 보이지만, 현재 논의되는 기금형 제도의 핵심인 ‘수탁자 책임 법제화’를 대입하면 대부분 해소될 수 있다.
첫째, “손실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는 불안감: ‘국가가 감시한다’는 강력한 신호
가입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손실’이다. 이는 자신의 노후 자산이 전문가의 손에 맡겨져 공격적으로 운용되다가 원금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는 막연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는 현재 논의 중인 법안이 가입자의 ‘안전’을 어떻게 담보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논의 중인 법안들에는 기금전문운용기관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허가·감독·조사·시정명령·영업정지 권한이 포함된 경우가 많다. 이는 단순히 금융기관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나서서 감시하고 잘못을 바로 잡겠다’는 강력한 권위의 신호다.
또한, 의사결정 과정을 일정 기간 기록하고 가입자가 열람할 수 있게 한다면 ‘숨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투명성의 신호를 보내, 운용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도덕적 해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 아니냐’는 냉소는 지난 20년간 계약형 제도하에서 퇴직연금사업자들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보여준다. 가입자들은 새로운 기관이 생겨도 결국 금융기관의 이익을 대변할 뿐, 자신들의 편이 되어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불신을 깨기 위해 기금전문운용기관의 이사회에 ‘독립이사 과반수’를 의무화하고, 그중 ‘가입자 추천 독립이사를 포함’하도록 한다면 불신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다.
이는 의사결정 과정에 가입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내 편’이 확실히 존재함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정성’과 ‘대리인 문제 해소’에 대한 가입자들의 감정적 신뢰를 얻는 핵심 장치다.
이처럼 법제화가 담보하는 ‘국가의 감시’와 ‘내 편의 존재’는 가입자들이 느끼는 손실에 대한 불안과 실효성에 대한 불신을 상당 부분 불식시킬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내용이 가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점뿐이다.
유명무실한 계약형 vs 엄격한 기금형...‘수탁자 책임’의 격이 다르다
전세계적으로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금형 제도를 채택한 연금 선진국들이 높은 수익률과 안정성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엄격한 수탁자 책임(Fiduciary Duty)’ 원칙을 법제화하고 철저히 감독했기 때문이다.
수탁자 책임이란, 타인의 자산을 관리하는 수탁자(Fiduciary)는 오직 수익자(가입자)의 이익을 위해서만 충실하고 선량하게 행동해야 할 의무를 진다는 뜻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이처럼 명확하다. 미국의 ERISA(종업원퇴직소득보장법), 호주의 초거대 연기금들은 모두 이 수탁자 책임 원칙 위에서 운영되며, 이를 위반했을 시에는 천문학적인 배상 책임과 법적 처벌을 받는다. 수탁자는 가입자의 이익에 반하는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 없으며, 항상 최선의 선택을 했음을 스스로 입증해야 할 무거운 책임을 진다.
반면, 우리나라의 현행 계약형 제도를 돌아보자.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에 수탁자 책임과 유사한 선관주의 의무가 명시되어 있지만, 이는 사실상 ‘유명무실(有名無實)’하다. 지난 20년간 퇴직연금 사업자가 수탁자 책임을 다하지 못해 가입자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법적 책임을 지거나 제재를 받은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반해, 새로 도입될 기금형 제도는 처음부터 엄격한 수탁자 책임을 전제로 설계된다. 여기에 더해서 ‘성과평가 및 공시’를 통해 운용 실력이 좋은 1등부터 꼴찌까지 투명하게 공개하고, ‘이전권’을 보장해 가입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운용기관을 언제든 떠날 수 있게 함으로써 사업자들에게 끊임없는 긴장감을 부여할 수 있다. 이는 가입자를 보다 더 적극적이고 적절하게 보호하는 실질적인 메커니즘이다.
기금형 제도 도입에 대한 반대 여론은 제도의 문제가 아닌, 소통과 정보의 부재가 빚어낸 ‘성장통’이다. 가입자들의 우려는 당연하며, 이를 해소할 책임은 정책 당국과 전문가들에게 있다. 그 해답은 바로 ‘수탁자 책임의 엄격한 법제화’와 이를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는 데 있다.
‘국가가 감시하고, 내 편이 지켜주며, 실력 없는 곳은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믿음. 이것이 법 조문을 통해 가입자에게 주어야 할 최종적인 메시지다.
현재의 유명무실한 계약형 제도의 선관주의 의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수탁자 책임 원칙을 기금형 제도의 심장으로 이식할 때, 비로소 가입자들은 손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의 노후 자산을 믿고 맡길 수 있게 될 것이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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