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만도 했다. 오늘이 그들의 첫 만남이었으니까. 내가 자주 찾는 카페에 그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면서, 어쩔 수 없이 자리가 만들어진 것일 뿐이었다. 특별히 소개해야 할 저리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최 사장은 본래 오늘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나와 카페 주인 사이에는 꼭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끼어든 최 사장이 우리 사이의 자리를 가로채면서, 우리는 서로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더욱이 최 사장의 말은 헛되고 무의미한 말들의 홍수였다. 남의 사생활에 주제넘게 끼어드는 참견까지 더해지자 듣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그가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의 내 모습이 겹쳐 보여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몇 차례 시도 끝에 나는 그의 말을 가로채고, 아줌마와 단둘이서만 아는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뿔싸, 최 사장은 또다시 우리 대화에 끼어들려 했다. 나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니, 마치 급한 약속이라도 떠오른 듯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없는 약속을 급히 지어낸 것이 분명했다.
카페의 좁은 골목길을 걸어 나왔다. 늦은 오후,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얼굴을 강하게 내리쬐었다. 몸이 점차 무거워지고 피로가 밀려왔다. 이 골목만 빠져나가면 작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오고, 그 너머로 큰 도로가 펼쳐진다. 그런데 갑자기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심한 현기증이 몰려와 나는 다리 난간을 꽉 붙잡았다.
발밑에서는 계곡물이 세차게 흐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며칠 전 내린 비로 불어난 물줄기가 바위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이상하게도 점차 귓가가 멍해지고 소리가 멀어지는 듯했다. 나는 한참 동안 난간에 한 손을 짚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놀랍게도 주변이 한순간에 정지했다. 계곡의 물살이 멈추고, 옷깃을 스치던 바람도, 햇살마저 움직임을 멈췄다. 새소리도 사라졌다. 내 주변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물체만이 아니었다. 시간마저 멈춰 있었다.
살며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전혀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눈앞의 현실은 마치 투병한 유리 벽 너머에 갇힌 것처럼 보였다. 이곳은 가상 공간, 아공간(我空間)이었다. 우리가 사는 현실과 평행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법칙이 다르게 작용하는 또 다른 차원. 현실의 흐름은 그대로 둔 채, 마음속 깊이 묻어둔 기억과 가능성, 지나간 선택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내면의 공간이었다.
시간이 멈춘 그곳에서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복도 양옆으로 수많은 방문이 늘어서 있었고, 대부분은 활짝 열려 안이 훤히 보였다. 그중 한 곳이 내 시선을 붙들었다. 다른 방들과 달리 두꺼운 짙은 커튼이 내려져 있었고, 커튼 사이로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어슴푸레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남에게 결코 들켜서는 안 될 그 무엇이 숨겨져 있는 방인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그 방 앞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결코 돌아서지 않으리라.’
숨을 길게 내쉬며 다짐을 새기고, 굳은 결심으로 커튼을 활짝 열었다.
방 안에는 키가 작은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손님용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는 팔걸이에 턱을 괴고 내 말을 심각한 표정으로 듣기 시작했다.
‘그가 내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이제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릴 거야.’
그 생각은 난센스였다. 아무리 곱씹어도 말도 안 되는 장면이었다. 상대의 태도에서 이미 알아차렸어야 했다. 대화하려는 상대가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괴고 듣고 있다면 신중한 자세가 아니라 나를 얕잡아보는 태도였다. 그 말은 곧 나에게 대한 신뢰가 없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당면한 문제에 관해 얘기하는 중이었다. 내가 말했고, 그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 그 자리, 그와의 대화는 적과의 동침 같은 어처구니없는 현대판 오월동주(吳越同舟)였다. 당시 내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솔직히 내 이야기를 했고, 심지어 치명적인 약점도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 적군에게 내 패를 몽땅 내놓은 셈이었다.
뒤늦은 고백이지만 그 자리는 내가 직장을 떠나게 된 신호탄이었다. 어렵게 대학을 마치고 어렵게 구한 첫 직장이었고, 그 남자는 나의 진로를 쥐고 있던 직장 상사였다. 커튼으로 가려졌던 그 방에서 내가 쌓아온 기대와 미래는 너절하게 조각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인정했어야 했다. 진실을 말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자의 비참한 운명에 이미 발을 들여놓았음을.
‘트로이 목마 속에 병사가 숨어 있다’라고 외친 카산드라 공주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아 트로이가 멸망했던 것처럼, 카산드라 신드롬에 걸린 자들의 삶은 외롭게 홀로 걷는 길이다.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상대와 정직하게 대화하는 것은 독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를 믿어주지 않는 현실도,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상황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투명한 통찰력에 기반해 진실을 말한다고 확신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커튼을 젖히고 방을 나올 때 그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번지는 걸 얼핏 보았다. 그 미소는, 내게 보인 유일한 미소이자 우중충한 미소였다. 그 미소의 의미를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지난날의 나였다. 세상이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도, 내가 조롱거리였다는 사실도, 내 바른 판단과 진심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현실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직장을 그만둔 후 내 삶은 변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격변의 시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남들과 대화는 여전했지만, 진심을 털어놓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변화였다. 점차 내 속말을 삼키기 시작했다. 속에서 말이 불쑥 치솟다가도 다시 입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술이 내 속내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밤새 술김에 진심을 쏟아냈고, 다음 날 아침이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척했다. 후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술에 취하면 마음속에 쌓인 말들이 요동쳤다. 울컥 쏟아진 말들은 빠르게 여기저기 달려갔다. 다음 날 아침, 그 말들의 폭주에 나조차 아연실색했다. 말은 한 번 입 밖으로 나오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체적인 생명력을 얻어 나를 괴롭히고, 심지어 나 자신을 왜곡하기도 했다. 매일 밤 카산드라처럼 진실을 외쳐도 다음 날 돌아오는 건 무시와 불신뿐이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나는 결심했다. 말을 봉인하기로.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마음 깊숙이 감추고 꼭꼭 잠가버렸다. 그 대신 세상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맞춰주고, 때로는 냉소를 섞어 무심한 듯한 말만 내뱉기 시작했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칠 무렵,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멀리서 새소리가 들여왔다. 나는 아공간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얼마나 그곳에 있었을까. 해가 서산 너머로 넘어가며 북한산 능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다시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세차게 흐르는 계곡물을 묵묵히 바라봤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저 계곡물처럼 거침없이 흘러간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 후회하는 것은 때론 어리석고 헛되고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가끔 아공간에 들어서야 할 것이다. 뛰어들어 아직 열리지 않은 문들을 열어야 한다. 그곳에는 지난날의 내가 지금의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다리를 건너 큰 도로로 나오며 오늘 하루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참 의미심장한 날이었다. 카페에서 무의미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최 사장의 모습에서, 예전에 진심을 내보이다 상처받았던 내 모습이 보였고, 동시에 진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홀로 서 있던 카산드라의 슬픔을 다시금 떠올린 하루였다.
[정보철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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