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일 이음연구소장, 경영학 박사.
실제 우리나라 퇴직연금의 현실은 참담하다. 가입자들의 무관심과 금융지식 부족으로 인해 87.2%라는 압도적인 비중이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몰려 있다. 안전하다는 이유로 선택한 이 상품들은 정작 인플레이션도 따라잡지 못하는 저조한 수익률로 퇴직연금을 '잠자는 돈'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최근 흥미로운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인공지능 기반의 로보어드바이저가 퇴직연금 운용에 도입되면서 놀라운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2025년 추정치에 따르면, 로보어드바이저를 활용한 퇴직연금의 평균 수익률이 13~16%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반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 4.77%의 무려 2.7~3.4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러한 격차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투자 성향별로 살펴봐도 적극투자형은 18~22%, 중립형은 12~15%, 보수형도 8~10%의 수익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가장 보수적인 투자 성향에서도 기존 퇴직연금 평균의 2배 가까운 수익을 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로보어드바이저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방대한 양의 금융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정교하게 설계된 알고리즘에 따라 기계적이고 객관적인 투자 판단을 내린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설정된 원칙에 따라 일관성 있게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며, 인간이 놓치기 쉬운 미세한 시장 신호까지 포착해 투자 기회를 발굴한다. 24시간 시장을 모니터링하면서 지속적으로 리스크 관리와 자산 재분배를 수행하는 것도 큰 장점이다.
최근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을 위한 대안으로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국민연금처럼 별도의 기금을 설립해 전문기관이 통합적으로 자금을 운용하겠다는 구상이다. 규모의 경제를 통해 운용 효율성을 높이고 수익률을 개선하겠다는 취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일까. 기금형 제도는 도입까지 상당한 시간과 복잡한 사회적 합의 과정이 필요하다. 자칫 노사 간 갈등이 빚어져 근로자들의 적립금 운용에 불확실성을 가중시킬 우려도 있다. 또한 대규모 기금 운용 방식으로는 개인의 다양한 투자 니즈를 세밀하게 반영하기 어렵다는 근본적 한계도 존재한다.
그러나 로보어드바이저의 성과가 시사하는 바는 이와는 다르다. 거대한 기금을 조성하고 복잡한 지배구조를 만드는 것보다, 현행 퇴직연금 제도 내에서 개인들이 '일임형 투자'를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일임형 투자는 현재 제도 틀 안에서도 즉시 실행 가능하다. 개인별 투자 성향과 목표에 맞는 맞춤형 전략을 적용할 수 있고, 로보어드바이저의 장점을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상대적으로 간단한 규제 정비만으로도 시행할 수 있어 시간과 비용 면에서 훨씬 효율적이다.
퇴직연금 수익률 부진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심각한 사회문제다. 다행히 AI 기반 로보어드바이저가 이 문제 해결의 강력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제는 말보다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부와 퇴직연금 사업자, 그리고 가입자 모두가 열린 마음으로 AI 로보어드바이저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일임형 투자라는 날개를 달아줄 때, 비로소 우리의 퇴직연금은 잠에서 깨어나 든든한 노후의 주춧돌로 거듭날 수 있다.
100세 시대 노후 준비, 이제는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다.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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