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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 칼럼⑫]회사는 ‘대출 금리’를 챙기고, 직원은 ‘마이너스’를 떠안는다

‘방치된 자유’ DC형 퇴직연금… ‘상품 선정 위원회’ 의무화가 시급한 이유

신규섭 금융·연금 CP

2026-01-16 13:21:24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11편에서는 미국 퇴직연금의 진화 과정을 통해, 해법이 ‘방치된 자유’가 아니라 ‘설계된 보호’에 있음을 확인했다. 이번 12편에서는 그 보호 시스템의 핵심 뼈대인 ‘거버넌스(Governance)’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DC형 퇴직연금에서 실종된 기업의 책임을 짚고, 이를 바로 세울 제도적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어느 중견기업의 재무팀장 A씨는 최근 퇴직연금 사업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고민에 빠졌다. 직원들의 수익률을 안정적으로 관리해 줄 증권사가 눈에 들어왔지만, 그의 최종 선택은 주거래 은행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해당 은행이 회사의 법인 대출 금리를 0.2%포인트 인하해 주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A씨는 스스로를 이렇게 합리화한다.

“어차피 우리 회사는 DC형(확정기여형)이잖아. 회사는 부담금만 내면 책임은 끝이고, 운용은 직원들 몫이지. 회사 비용을 줄이는 게 내 역할 아닌가.”
이 짧은 에피소드에는 대한민국 DC형 퇴직연금이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압축돼 있다. 회사는 직원들의 노후 자산을 담보로 ‘대출 금리 인하’라는 실질적 이익을 챙겼고, 그 결과 직원들은 수익률 관리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사업자에게 노후를 맡기게 됐다. 이익은 회사가 가져가고, 손해(낮은 수익률)는 오롯이 직원이 떠안는 구조다. 400조 원을 넘어 500조 원을 향해 가는 퇴직연금 시장의 민낯이다.

거버넌스의 실종, DB에는 있고 DC에는 없는 것

퇴직연금 거버넌스란 결국 “누가, 어떤 방식으로, 가입자의 이익을 위해 결정하고 책임지는가?”에 대한 사회적 약속이다. 그러나 현행 제도에서 이 약속은 절반만 지켜지고 있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에 따르면, 회사가 운용 책임을 지는 DB형(확정급여형)을 도입한 300인 이상 사업장은 ‘적립금운영위원회’를 설치하도록 돼 있다. 회사가 약속한 연금을 지급할 수 있는지, 운용은 적절한지 점검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문제는 대다수 근로자가 가입해 있고, 모든 투자 위험을 개인이 떠안는 DC형이다. 현행법상 DC형에는 이와 같은 거버넌스 구축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은 매년 부담금을 이체하는 것으로 법적 책임을 다했다고 여긴다. 가입자가 어떤 상품에 노출돼 있는지, 수수료는 합리적인지, 사업자가 성실하게 운용하고 있는지 점검할 공식 기구는 없다.

환자가 수술 도구를 직접 고르지 않듯, 연금 운용 역시 전문가의 판단과 책임 구조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DC형 가입자는 조종사 없는 비행기에 혼자 탑승한 승객처럼 방치돼 있다. DC형의 문제는 자유 그 자체가 아니다. 자유에 따르는 책임의 주체가 제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DB도 유명무실한데, DC는 다를 수 있는가”
물론 이런 반론은 가능하다. “DB형에도 적립금운영위원회가 있지만, 상당수는 형식적으로 운영되지 않는가”라는 지적이다. 이 비판은 뼈아프지만 사실에 가깝다. 시행령과 행정해석을 거치며 DB형 위원회는 ‘무엇을 결정했는가’보다 ‘회의를 열었는가’가 중요해진 측면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DC형에서는 거버넌스가 반드시 달라져야 하는 이유다. DB형에서는 수익이 나빠도 최종 책임이 회사에 남는다. 반면 DC형에서는 그 결과가 개인 계좌에 즉시 반영된다. 책임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구조에서, 기업의 의사결정에 아무런 거버넌스도 두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방치다. DB형 거버넌스의 실패는 DC형 거버넌스를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제대로 설계해야 할 이유다.

2005년, 우리가 빠뜨린 ‘수탁자 책임’

왜 이런 불균형이 생겼을까. 한국의 퇴직연금 제도는 IMF 외환위기 이후 “퇴직금을 사외에 안전하게 적립해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 속에서 2005년 도입됐다. 제도의 초점은 ‘보관’에 맞춰졌고, 자산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수탁자 책임(Fiduciary Duty)’과 거버넌스 논의는 충분히 축적되지 못했다.

반면 미국은 달랐다. 2001년 엔론(Enron) 사태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당시 수많은 직원들이 회사의 방치 속에서 퇴직연금 자산을 자사주에 집중 투자했고, 회사가 파산하자 노후 자금까지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 비극 이후 미국은 2006년 연금보호법(PPA)을 통해 제도의 방향을 수정했다.

미국 기업들은 DC형이라 하더라도 연금 운용 과정에서 가입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할 수탁자 책임을 진다. 기업 내에 설치된 투자위원회(Investment Committee)는 수많은 상품 가운데 수수료가 과도하거나 성과가 부진한 상품을 걸러내고, 검증된 소수의 상품만을 직원에게 제공한다. 만약 회사가 대출 금리 등 사적 이익을 위해 부적절한 사업자를 선택할 경우, 막대한 집단소송에 직면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 기업은 자발적으로 ‘게이트키퍼(Gatekeeper)’ 역할을 수행한다.

불과 1년 남짓한 시간 차이였지만, 미국은 ‘보호’를 제도화했고 우리는 ‘방치’를 제도화했다. 그 차이가 오늘날의 수익률 격차로 나타나고 있다.

DC형에도 ‘상품 선정 위원회’를 의무화하라

이제는 계약형 퇴직연금 제도의 구조적 결함을 바로잡아야 할 시점이다. 필자는 DC형 도입 기업에도 ‘적립금운영위원회’에 준하는 ‘상품 선정 위원회’를 의무화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기업에 새로운 부담을 지우자는 주장이 아니다. 기업은 이미 퇴직연금 사업자를 선택하고 있고, 그 선택이 직원들의 수익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만 그 권한에 상응하는 책임을 제도적으로 연결하자는 것이다.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는 DC형 운영을 심의하는 위원회를 설치하고, 노사 대표와 함께 외부 전문가가 참여해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 위원회는 사업자가 제시하는 수백 개의 상품을 그대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 투자에 적합한지, 수수료는 합리적인지, 성과 관리가 이뤄지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검증된 상품군’을 선별해야 한다. 또한 회사의 대출 금리 우대 등 부수적 거래가 사업자 선정에 영향을 미칠 경우, 이는 수탁자 책임 위반으로 명확히 규율해야 한다.

거버넌스는 ‘간섭’이 아니라 ‘가장 따뜻한 보호’

“직원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줬다”는 말은 기업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금융 지식이 부족한 개인에게 수백 개의 상품 리스트를 던져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임에 가깝다.

거버넌스는 차가운 규제가 아니다. 그것은 “누가 나를 위해 이 소중한 돈을 관리하고, 책임져주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제도적 응답이다. 이제는 2005년 도입 당시 놓쳤던 수탁자 책임과 거버넌스라는 영혼을 DC형 제도 안에 불어넣어야 한다. 기업이 ‘대출 금리’가 아니라 ‘직원의 노후’를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때, 대한민국 퇴직연금은 비로소 ‘무늬만 연금’이라는 오명을 벗고 진정한 노후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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