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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철의 한끗차이] “나를 그냥 놔두시오.”

의존의 그림자

2026-03-31 09:36:53

지난여름 이후, 나는 M의 어떤 메시지도 열어보지 않았다. 궁금하기는커녕, 내 안의 깊은 곳에서 울음처럼 터져 나오는 외침이 있었다.

“그만, 나를 내버려 두라고!”

20년 전, 내가 M을 돕는다 했을 때 주변에서는 의아해했다. 그는 파산자였고, 빚더미에 쫓기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강하게 옹호하며 ‘믿음’을 강조했다. 마치 ‘그를 믿는 내가 좋은 사람’인 것처럼 포장하기도 했다.

“걱정하지 말라.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M이 보낸 메시지에 응답을 멈췄다. ‘함께 행복해지자’라던 지난날 그의 말은 결국 나를 꼬드기기 위한 말이었다. 어느 순간 무너지는 현실 앞에서,즉 사무실임대료도 못 내던 그가 마침내 강남의 대형 아파트로 몰래 이사하자, 주변은 ‘헛똑똑’하다며, 나를 몰아붙였다.

“넌 팽 당한거야.”

그전부터 그의 말과 행동엔 공허함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저간의 속사정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속은 것은 나였지, 그가 나를 속인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진심으로 속였다면 차라리 후련하게 욕이라도 했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만든 착각 속에 긴 세월을 보냈다는 사실이 가장 견딜 수 없었다. 이것은 어쩌면 이 시대에 흔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내가 M의 메시지를 거부한 이유는 단순히 그때만은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환상의 사슬’ 씌웠고, 나는 그 굴레에 갇혀 있었다. 이를 깨닫는 순간, 나는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지난여름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 웃음을 허공에 흩뿌렸다. 문제는 내가 질병에 걸린 것을 뒤늦게 알았다는 사실이다.

‘빌어먹을, 내가 병에 걸렸다니….’
그 병은 ‘타인을 의심하지 못하는 질병’이었다. 남을 무작정 의심하는 것만큼, 무조건 믿는 것도 큰 문제였다.

내가 경악했던 것은 그 질병 속에 숨어있는 코드였다. ‘의존’이라는 코드, 내 무의식 속에는 ‘타인에 대한 의존’ 틀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타인을 무작정 믿은 것은 타인에게 무작정 의존하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라는 말이다.

겉으로 자유를 외치며 방랑하면서도 내 안의 깊은 곳에서는 뿌리 깊은 의존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은 나를 놀라움으로 몰아넣었다.
“세상에, 자유를 향한 나의 방랑도, 결국 내 안의 의존에서 비롯된 것이었단 말인가?”

의존은 마음을 둔화시킨다. 둔해진 마음으로는 사실적인 삶,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기 어렵다.
M과의 20년은 그 의존의 결정체였다. 이것을 직시하지 않으면 나는 앞으로도 제대로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이대로 둘 수만은 없었다. M과의 일을 계기로 지난여름부터 나는 그 원인을 줄기차게 찾아 헤맸다. 불행하게도 나의 어린 시절에서 실마리를 발견했다.

산속 깊은 곳,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소년은 도시락통을 조심스레 꺼냈다. 소년은 김치를 우걱우걱 씹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집 김치는 맛있다.”

소년이 홀로 산속에서 도시락을 꺼낸 건 학교 친구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가기 위해서였다. 그 날은 소풍날, 모두 모여서 점심을 먹는 것이 불문율이라면 불문율이었다. 어머니가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열고, 서로의 반찬을 나누는 날이었다. 김밥, 고기, 김이 인기를 끌었지만, 김치만 싸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아침, 소년은 방문 앞에서 여러 번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다. 전날 술에 찌든 계모가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그녀의 시선은 멸시로 가득했다. 아버지가 없을 때는 계모가 소년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과거에는 쌍욕까지 감수해야 했지만, 어쩐 일인지 그날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년은 공손히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오늘은 소풍날이에요’라고 말하자, 계모는 선심 쓰듯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소년의 얼굴에 던지고 방문을 쾅 닫았다. 단 한 개의 동전을.

소년은 서러움보다는 친구들과의 탁구 약속이 떠올랐다. 고개를 숙여 바닥에 뒹굴고 있는 동전을 집어 들었다. 부엌에서 김치를 챙기면서 소년은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 돈으로 오늘은 학우들과 탁구를 칠 수 있을 거야.”

악이란 늘 거짓과 결탁한다. 소년과 계모 사이가 깨진 것도 그녀의 뻔뻔한 거짓말 때문이었다. 그녀는 소년을, 아버지를 포함한 친지들 앞에서 요사스러운 아이로 만들었다.

훗날 소년은 계모만 생각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 여자 속에는 뭔가 악한 그 무언가가 있었다. 단순한 증오는 아니었다. 그 여자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악에 오염될 듯했다. 계모는 지금 생각해보면 남을 완전히 지배하려는 가학증에 걸린 사람이었다.

“만약 악마를 만나게 된다면, 바로 그 여자일 거예요.”

어린아이가 악의 한가운데서 살아남으려면 방어기제가 절실했다. 그것이 바로 ‘잠’이었다. 밤에만 잠을 자는 게 아니었다. 훤한 대낮에도, 심지어 아침에도 빈 의자를 찾아 잠들었다. 잠은 악마가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하는 어린아이만의 몸부림이었다. 나중에 어른이 돼서도 낯선 곳의 빈 의자만 보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얼마 전 제주도 따라비 오름의 정상에 놓인 빈 의자, 월정리 해변에 놓인 빈 의자를 보고 눈시울을 붉어진 것도 같은 이유다.

악에 그대로 노출된 어린아이는 성인이 된 되에도 그 후유증에 시달린다. 정상적인 삶이 왜곡되거나 자신을 손상시키며 살아가게 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건강한 아이라면 누구도 겪는 부모에 대한 무의식적 성적 욕망이다. 그러나 이 욕망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의존적이고 유약한 어린아이의 특성을 유지하게 된다.

나는 어떤 만남에서도 늘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찾았다. 그 말인즉슨 성인 이후의 삶에서도 나는 5, 6세의 어린아이가 겪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함정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는 뜻이다.
적대적인 타인에게서조차 의존을 바랐을 정도였으니, 어리석음 그 자체였다. 물론 M과의 관계 또한 ‘의존’의 틀 속에 있었다.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나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제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내 인생을 본다. 짜증 나고 천박한 시선이다. 성경적으로 말해서 추방과 배척의 시선이다. 그렇다고 내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당장 극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사람마다 의식의 저 아래로 숨기고 싶은 것이 있다. 타인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은폐하고 싶은 것, 스스로 인정하기 힘든 그 무엇이다.
칼 융은 그것을 ‘무의식 속의 그림자’라고 불렀고,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융은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즉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할 다른 방법은 없다고 했다.
나는 내 그림자를 인정하고 지켜본다. 실패와 절망으로 가득한 새까만 어둠뿐이지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길임을 안다.

우리는 의존에 익숙하다. 하지만 의존은 필연적으로 부패로 이어지고 더 많은 의존을 낳는다. 그 어떤 의존도 자유로 이끌지 못한다.

인생이라는 땅은 누구에게도 가장 소중하다. 나는 그 땅을 다 알지 못한 채 길을 잃고 방황했다. 이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내 발로 그 땅을 밟아갈 것이다.

“나는 자유다!”

문득 쥐스킨트의 소설, ‘좀머씨 이야기’가 떠오른다. 좀머 씨는 말이 전혀 없다. 우박이 쏟아지는 날 “그러다 죽겠소”라는 화자의 말에 좀머씨는 겨우 한마디 한다. 나도 좀머씨처럼 단 한마디만 외치고 싶다. 운명이라는 신을 향해….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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