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일 이음연구소장(경영학 박사)
그 근저에는 ‘일임형(discretionary investment)’을 금지한 감독 규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부는 가입자 보호와 자산운용 자기의사결정이라는 명분 아래, 가입자가 전문가에게 자신의 자산 운용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그 결과, 가입자는 ‘알아서 잘 굴려달라’는 난감한 절벽앞에 설 수 밖에 없었고, 퇴직연금사업자들은 굳이 위법과 위험을 감수하며 수익률을 높일 유인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해 가입자인식조사((사)한국고용복지학회, 전국 만 20세 이상 남녀 근로자 2천명)에서 가입자들이 전문가에게 운용을 맡기고자 하는 ‘위탁(委託)의 욕구’와, 그 성과에 대해 기꺼이 보상하고자 하는 ‘성과 공유(成果共有)의 의지’가 시장참여자(감독당국·퇴직연금 사업자·사용자 등을 포함) 예상보다 훨씬 강력함을 보여준다.
데이터가 말해 주는 ‘위탁’과 ‘성과 공유’에 대한 열망
이 조사의 두 가지 핵심 결과는 퇴직연금 시장의 미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나침반이다.
첫째, ‘위탁 운용’에 대한 가입자들의 숨겨진 욕구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기금전문운용기관(기금형) 도입 시 자신의 퇴직연금 적립금을 맡길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의향 있음’(32.4%)이 ‘의향 없음’(26.5%)을 앞섰다. 이 수치는 단순히 찬반 비율의 우세를 넘어선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이는 지난 20년간 정부의 ‘일임형 금지’라는 규제 장벽에 막혀 표출되지 못했던 가입자들의 근원적 욕구가 반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금융시장에서 개인이 직접 상품을 선택하고 관리하는 것은 큰 부담이다. 가입자들은 ‘스스로 운용할 능력이나 시간이 부족하니,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가 알아서 잘 굴려주었으면 좋겠다’는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계약형 제도 하에서는 이 욕구가 실현될 방법이 없었지만, 기금형이라는 새로운 선택지가 주어지자마자 ‘맡기고 싶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결과는 ‘목표수익률 초과분에 대한 수익 공유’에 대한 질문이다. 응답자의 과반이 훌쩍 넘는 54.7%가 ‘수용 가능’하다고 답한 반면, ‘수용 불가’는 14.1%에 그쳤다. 이는 가입자들이 단순히 공짜 점심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운용사가 약속 이상의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그 결과가 좋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성과보수)을 기꺼이 지불할 의사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가입자와 운용사가 ‘제로섬 게임’이 아닌 ‘윈-윈(Win-Win)’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음을 의미한다. ‘내 자산을 불려준다면, 그 공로를 인정하고 기꺼이 성공의 과실을 나누겠다.’ 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성숙한 시장 참여자의 모습인가. 가입자들은 더 이상 고정된 수수료만 떼어가는 수동적 관리자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발 벗고 뛰는 ‘운용 파트너’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엄격한 수탁자 책임과 유연한 성과보수...새로운 시장의 두 날개
가입자들의 이러한 열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새롭게 도입될 기금형 제도는 두 가지 핵심 원칙 위에서 설계되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바로 ‘엄격한 수탁자 책임’과 ‘유연한 성과보수 체계의 활성화’이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제도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신뢰의 기반은 바위처럼 단단한 ‘수탁자 책임’에 있다. 가입자들이 자신의 퇴직적립금을 전문가에게 ‘위탁’하기 위한 가장 큰 전제 조건은 ‘신뢰’다.
이 신뢰를 담보하는 법적 장치가 바로 ‘수탁자 책임(Fiduciary Duty)’이다. 수탁법인은 오직 가입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여 행동해야 하며,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모든 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를 위반했을 시에는 강력한 법적, 재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성과보수 체계가 수탁법인의 과도한 위험 추구나 도덕적 해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수탁자 책임의 확립은 필수적이다. 가입자를 보호하는 강력한 갑옷(수탁자 책임)이 있을 때, 비로소 수탁법인은 수익률 제고라는 날카로운 창(성과보수)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
이는 운용사가 가입자의 돈을 가지고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리스크 관리와 분석 하에 ‘최선의 운용’을 하도록 강제하는 안전장치 역할을 할 것이다.
성장의 엔진: 유연하고 창의적인 ‘성과보수 시행령’ 마련
엄격한 책임의 틀이 마련되었다면, 그 안에서는 운용사들이 창의적이고 적극적으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어야 한다. 특히, 성과보수 체계의 구체적인 내용을 규정할 ‘시행령’은 미래 시장의 성패를 가를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시행령은 획일적인 기준을 강요하기보다, 다양한 성과보수 모델이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유연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목표수익률 설정 방식, 초과 수익에 대한 분배 비율, 손실 발생 시의 운용보수 페널티(High-Water Mark 방식 등) 등을 시장 자율에 맡겨 혁신적인 상품이 출시될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 가입자들은 A 운용사의 ‘안정 추구형 성과보수 모델’과 B 운용사의 ‘고수익 추구형 성과보수 모델’을 비교하며 자신의 투자 성향에 맞는 최적의 파트너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세세한 규제로 시장의 손발을 묶는 것이 아니라, ‘수탁자 책임’이라는 큰 원칙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하고, 운용사들이 투명하게 정보를 공시하여 가입자들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위 조사 결과는 명확한 정책적 방향을 제시한다. ‘맡기고 싶다’, 그리고 ‘잘하면 보상하겠다’. 이 두 가지 가입자의 목소리는 지난 20년간의 낡은 규제를 걷어내고, 가입자와 운용사가 ‘같은 배’를 타고 수익률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시장을 열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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